언론에 소개된 법무법인 호민
[시인이 만나는 법] 정년 퇴임하는 강영호 원로법관… “법관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그것이 법원을 지키는 길”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원로법관을 끝으로 정년퇴임하는 강영호(65·사법연수원 12기) 전 법원장은 마주 앉자마자 <법률신문>과의 각별한 인연부터 들려주었다.


1997년 9월 IMF 사태를 맞았을 때 채무가 많아서 도산 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너도나도 화의제도에 기대 회생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기업과 금융 파트에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던 강 법원장이 화의제도의 본질은 부실기업들을 구제하는 데 있지 않다는 글을 <법률신문>에 기고했고 그것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면서 IMF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실기업들이 도태되면서 한국이 IMF 사태를 비교적 큰 출혈 없이 극복하는 데 강 법원장의 <법률신문> 기고문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특허법원장과 서울서부지방법원장을 역임한 강영호 법원장은 정년을 맞아 37년 5개월 간의 치열하면서도 곡진했던 법원 생활을 마무리한다. 온유한 인상이지만 단단한 체구에 맑고 깊은 안광을 가진 그는 이미 세월이 안겨준 지혜의 깊이와 너비를 넉넉히 품고 있는 이처럼 보였다. 그는 어떤 연유로 40년 가까이 걷게 될 법률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을까.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때 정의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혀왔어요. 그 순간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게 바로 법관이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마음을 품고 공부했고 법대에 들어와서도 1학년 때부터 사법고시 공부를 했어요. 1학년 때는 보통 일반교양 수업을 듣는데, 저는 법학전공 수업을 1학년 때부터 들었어요. 그래서 4학년 때 차석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죠. 부모님도 무척 기뻐하셨어요. 사법고시 합격된 날이 제 삶에서도 가장 기뻤던 날이에요.”


사람의 기호나 욕망은 수시로 바뀌기 마련인데, 강 법원장의 말에 따르면 그의 삶은 까까머리 소년 시절의 꿈을 좇아 온전히 그것을 펼치는 데 바친 셈이다. 자신의 꿈을 의심하지 않고 다치지 않게 가꾸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의 부모님과 가풍이 궁금했다.


“고향이 지금은 대전광역시로 편입되어 있는 충남 대덕이었어요. 그곳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기시기로 한 부모님과 함께 상경을 했죠. 아버지는 시계 같은 정밀기계를 다루는 기술을 갖고 계셔서 시계방을 하셨어요. 학교는 중학교만 나오신 분이었는데, 아무 간섭없이 자식들을 자율적으로 키우셨어요.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셨는데요. 새벽에 단칸방에 어떤 소리 같은 게 나서 깨면 어머니가 저를 위해 한쪽 구석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기도 때문에 제가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강영호 원로법관의 눈에서 눈물이 비어져 나온 건 그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러니까 대통령이 일곱 번이나 바뀌고 강산이 네 번 가까이 변하는 동안 재판정에서 냉정을 유지하며 칼날 같은 분별력을 발휘하며 살아왔을 이가 어머니의 기도를 추억하며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떨구다니. 어머니라는 존재는 아마도 그런 존재인 모양이다. 정의와 불의를 판정하느라 아무도 몰래 외로웠을 이를 온전히 품어주는 존재. 감정을 추스른 강 법원장은 특허법원장 시절 추진했던 혁신적인 안건에 대한 그간의 과정과 소회를 장시간을 할애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당시 특허법원은 특허청 사건이나 소송만을 담당하는 소극적인 법원이었어요.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성장하고 있는 추세와는 맞지 않는 역할이었죠. 당시 특허 침해 사건이 많았는데, 그로 인해 발생한 손해배상 소송은 정작 고등법원이나 지방법원에서 맡았죠. 그런 시스템 때문에 특허법원의 경쟁력이나 전문성이 떨어졌어요. 특허청에는 특허조사심의관이 있는데도 전문성을 살리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특허 침해로 인한 손해배상 사건도 특허법원에서 맡아야 하는 것과 국제재판부를 설치해야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추진해서 결국 관철시켰지요.”


그의 수사와 논리에는 막힘이 없었다. 숱한 판례를 거치며 치열하게 학습되고 체득된 지혜를 내놓은 현역 재판관의 모습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내심 이런 분이 정년 때문에 법원을 떠나야 하는 제도적 현실이 아쉽게 다가왔다. 사실 강 법원장은 법원의 재판관 수급 문제와 정년 문제의 불합리함을 여러 차례 제기하기도 했다. 현재의 정년 제도와 로스쿨 제도 하에서는 법원이 우수한 재판관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가 어려우니 시니어재판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그 골자다.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법관 임용 자격이 자꾸 바뀌었어요. 변호사 경력 기한을 계속 늘린 거죠. 이런 제도에서는 우수한 분들이 법원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법관 정년을 늘리는 것도 하나의 대안인데, 미국도 시니어법관제도가 있고 정년이 75세예요. 하지만 이 제도도 현실적인 면에서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시니어법관은 국가에서 연금과 월급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가능하려면 연금법 개정을 해야 하는데, 다른 공직 분야에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거든요. 법원과 정부가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는 법관 생활을 하는 동안 주심을 맡아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는 숱한 진보적 판결을 내놓았다. 우리 사회에 상명하복의 문화가 만연해 있을 때 술자리 회식에서 부하 직원에게 술을 강요해 고통을 안긴 회사의 상사에게 실형을 선고하며 적지 않은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고(이는 미국 뉴욕타임즈에도 한국 사회의 변화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선심성 공약으로 시작된 새만금방조제 사업 추진 과정에서 환경단체의 소송이 있었을 때 정치권의 외압을 이겨내고 소신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매우 이례적으로 성별정정을 요구하는 여성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남자가 여성으로 성별을 바꾸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여성이 남성으로 성별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요. 왜냐하면 외부로 돌출된 성기 같은 까다로운 생물학적 기준을 요구했거든요. 제 재판에 서게 된 여성은 그런 기준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이야길 들어보니 정말 딱한 거예요. 취직도 못하고 병원에도 못 가고 가족과도 단절되어 있었죠. 그래서 과감하게 남성으로 살고 싶어 하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그분 손을 들어줬어요.”


당시 강 법원장은 현직 개신교 장로였기 때문에 더욱 획기적인 판례로 평가되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성별은 하나님이 만들고 내가 그들의 본질은 바꾼 건 아니지만 그들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역할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와 같은 소신 때문인지 강 법원장은 사법부 구성원의 폭넓은 신망과 존경 속에 법관직을 마치게 됐다. 정년에 즈음한 소회를 물으면서 짓궂은 질문을 슬쩍 끼워 넣었다. 사법부 최상급법원인 대법원의 재판관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같은 건 없는지를.


“대법관 후보로 세 번 정도 올라갔는데 인간적으로 서운한 게 왜 없겠어요. 대법관은 판사들의 꿈 같은 거니까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자리에까지 안 간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대신 법원장을 6년이나 하면서 많은 판사들도 알게 됐고 좋은 사람들과 인연이 생겼어요. 대법관 갔으면 6년 동안 기록에 파묻혔을 것 같아요. 게다가 원로법관까지 해보니까 다양한 측면에서 여러 경험을 하게 됐어요. 돌아보니 모든 게 다 감사하더라구요. 제가 스물일곱에 판사가 됐는데, 부장님들이 볼 때 얼마나 어리게 보였겠어요. 내가 모신 대법관님들도 다들 나를 돌보고 가르쳐주셨고 배석들도 다 좋은 분들이었어요. 법원장에 있을 때도 구성원들이 전부 다 나를 도와줬어요.”


온유한 인상을 가진 이들의 바탕에는 겸허함이 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그 겸허함은 실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실토라기보다는 타인을 넉넉히 품고 인정하는 풍요로운 마음밭의 표정이리라. 사실 근년 들어 정치적 풍파 속에서 대법원의 위신이 많이 손상된 게 사실이다. 법원의 구성원으로서 그런 걸 지켜보는 마음이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현직 법관으로서 대법원이 국민의 기대와 신망을 저버리는 걸 지켜보는 게 참 가슴아프고 속상했어요. 사법처리를 받은 양승태 대법원장님은 금전을 받는 등 개인적 비리가 있었던 건 아니고 정치적 파장 속에서 그런 일을 겪은 거라고 보는데요, 판사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해요. 그게 제일 중요해요. 판사가 골프를 안 치고 술을 안 마시면 실수할 일이 없다는 말이 있어요. 저는 그걸 지켰어요. 자신을 지키는 건 자신밖에 없어요. 누가 자신을 지켜줘요.”


사법부는 한 국가의 의로움을 지키는 보루와도 같은 곳일 테다. 국가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불의한 의혹으로부터 지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원로법관의 간곡한 진언이 바투 마음을 일렁였다. 끝으로 후배 법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없는지를 인터뷰에 배석한 <법률신문> 기자가 물었다.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은 그의 퇴임사에서 확인되었다.


“큰 사건은 작게 보고, 작은 사건은 크게 보라는 것입니다. 큰 사건은 크게 보면 그곳에 매몰되어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건들은 멀리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건의 전체적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작은 사건은 그냥 가볍게 치우쳐 지나가기 쉬운데 그런 사건일수록 크게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생에 한번 정도 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일수록 당사자 이야기를 잘 들어 성의 있게 재판을 해 준다면 이 사람은 평생 그 판사를 잊지 못할 것이며 그것이 사법부에 대한 신뢰로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왜 아니겠는가. 큰 것을 가까이에서 보면 ‘벽’일 뿐이고 작은 것을 먼 데서 보면 ‘점’으로밖에는 안 보이는 것을. 그것은 진실과는 아주 먼 기괴한 추상일 것이다. 추상만으로 구성되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면서 보니 강영호 법원장의 얼굴이 마치 거칠고 까슬한 모래알 사이를 통과하는 억겁의 시간 동안 맑고 곱게 개어진 점토로 빚은 단아한 청자처럼 보였다.




출처: 법률시인/ 작성자: 김도언 시인 (소설가)

https://www.lawtimes.co.kr/news/184801